송암사

경전공부

청화스님─天地宇宙(천지우주)가 다 부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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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암사 댓글 0건 조회 1,790회 작성일 14-06-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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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地宇宙(천지우주)가 다 부처님입니다/청화 큰스님

부처님의 신비한 힘을 믿으십시오.
부처님의 무한의 힘입니다. 참다운 님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흠모하고 추구하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은 맑아지고 안온한 충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내 몸에도 가득 차 있고 우주 공간에도 충만해 있습니다.
부처님을 인격적 생명체로 생각하지 않고 원리로만 추구하면 한계가 있습니다.
극락, 도, 보리, 본질, 본래면목, 주인공, 진아, 진여, 부처님은 나의 본질,
내 생명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진여불성이 바로 우리 마음이라는 생각을 여의지 않으면 그 공부는 다 옳습니다.
불자의 목적은 성불에 있지만 전생 금생 업장으로 성불은 먼 길입니다.
이 때는 깊은 참회와 이행문(易行門)을 통한 염불이 성불하는 데 가장 쉽습니다.
닦는 길이 어려우면 도중에 포기합니다.
성불의 문 수행의 문은 쉬운 문을 택해야 합니다.
인생은 무수만생無數萬生 오랜 나그네 길입니다.
성불을 못하면 다시 몇 생이고 윤회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향이며 우리의 본성이요
본질인 영원한 불성에 못 가면 몇 생을 헤매야 합니다.
생로병사의 사고(四苦)를 겪어야 합니다.

어떤 불행도 우리가 지어서 받는 액운입니다.
어느 것도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지어서 받는 자업자득이니, 남을 원망하지 말고 참회해야 업장이 녹습니다
.
업장을 벗으면 인과를 초월합니다. 나무아미타불 한번 하면 그만큼 업장이 녹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 바로 우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우주 에너지의 우주음(宇宙音)이기 때문에 업장이 녹습니다. 귀신이나 신장이나 나무아미타불을 가장 숭배합니다.
금생에 그렁저렁 아무것도 못 깨닫고 죽는다 하더라도, 금생내내 나무아미타불 하신분은 이 몸둥이를 버릴 때는 번연히 깨달아, 나무아미타불 몇 마디에 극락세계를 가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끊임없이 하십시오.

금생에 그렁저렁 아무 것도 못 깨닫고 죽는다 하더라도. 금생 내내 나무아미타불 하신 분은 이 몸뚱이를 버릴 때는 번연히 깨달아, 나무아미타불 몇 마디에 극락세계를 가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나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보려고 애씁니다. 예수님도 유대 사람이 우매하여 방편이나 비유로만 말했습니다.
우주와 자성을 보는 가장 빠른 길이 참선이고 염불입니다.
성자나 도인의 말 가운데서 알맹이만 추리면 다 같으므로, 종교간에 다툴 것이 없습니다. 성자나 도인의 말은 옳은 말이며,거짓이 없습니다.

여러 종교 가운데서 인간 본질에 관한 진리를 체계화한 것은 불교입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세계이 석학들의 말입니다. 불교는 인간의 본질을 부처라고 봅니다.
이 본질을 보는 가장 합리적인 체계가 염불,참선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美)은 불교의 정定에 해당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眞)은 불교의 혜慧에 해당하며, 선을 추구하는 마음(善)은 불교의 계戒에 해당합니다.
또한 수행법으로 해서 인간성을 종합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은 염불,곧 염불선입니다. 공부도 우리 마음이 갖추고 있는 본질적 요소와 상응해서 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만 치우치면 불성과 상응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법이자연(法爾自然)입니다.

불교 공부는 쉬운 문(易行門)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공부도 인간성과 인간 본질에 맞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문이 정토문(淨土門)인데, 이것이 타력문(他力門)이고,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염불문입니다.
이행문은“내가 부처다”, “내가 본래 성불해 있다”고 생각하고 닦는 문입니다.
참선은 난행문인데 비해서,염불은 이행문이라고 합니다. 이해가 안되는 중생을 위해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극락이 십만억 국토를 지나서 있다고 하는 것은, 이행문의 말씀입니다. 난행문에서는 유심정토(唯心淨土), 마음이 극락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본시 극락이란 부처를 성취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불성.자성 자리만 믿고 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인격적으로 흠모 추구하여 “믿음”으로 닦는 것입니다.이것이 염불입니다. 부처님은 내 생명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입니다.
또 일체 공덕을 갖춘 생명체가 부처님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을 갈앙하는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흠모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닦아 가십시오. 부처님에 대한 사모와 그리움이 있어야, 우리 감성이 비약적으로 성장해서 한층 성불의 길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내 생명으로 갈망하고 연모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이 그리움은 고향을 떠난 사람이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함과 같습니다. 이 부처님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고 비약시킵니다.
친구간에도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이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미워하면 얼마나 추해집니까? 사람 사이도 그러한데,지고(至高)하신 부처님, 본래면목인 생명의 부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우리 마음을 얼마나 정화하고 비약시킬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염불입니다.
송과선(松果腺)은 머리 뒤쪽 간뇌 위쪽에 있는, 척추동물의 중추 의식 활동을 총괄하는 기관입니다. 칠세까지만 발달하고, 마음이 불순해지고 오염되면 발달을 정지한다고 합니다. 송과선이 활동해야 영생의 부처님을 봅니다. 부처님을 부르면 송과선이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부처님을 간절히 부르면,우리의 생리와 심리가 정화됩니다. 신방편信防便이란 부처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흠모추구하는 마음으로 믿으면, 속득 아유월치(速得 阿惟越致) 즉 후퇴가 없는 자리, 희락지(喜樂地)에 이른다고 용수보살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을 그리면 추구하는 방법은, 부처님 영상(무량공덕을 갖춘 영상)을 상기하며 부처님 이름(名號)을 부르는 것입니다. 무량광명을 상상하든지, 부처님의 원만덕상을 상상하든지, 부처님을 상상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그리워하며 부릅니다. 영상을 못 갖추고 그냥 명호만 불러도,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명호(이름)에 공덕이 묻어 있어서 불성이 밝아집니다.

자선 사업만 사회를 정화하는 사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한 생각 바로 먹는 정념(正念)이 우주를 정화시킵니다. 악한 마음은 우주를 오염시키고, 선한 마음은 사회와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때 출전했는데, 진묵대사는 안했으므로 사회 참여를 안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나,현장 출병만이 출전이 아닙니다. 얼마나 순수히 닦고 밝은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바라문이 승가를 무위도식(無爲徒食)이라 했을 때, 부처님은 심전개발(心田開發)이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수행자가 선방에 앉아 수행한다면, 그가 백번 출전한 것보다 나은 참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해 현장에 가서만 환경정화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맑은 생각이 더 많은 영향력으로 사회나 환경 정화에 참여한 효과를 거양(擧揚)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선자는 부처님 체성을 간직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보면 모두가 부처요 천지 우주가 부처님인 것을 꼭 믿어 버리면 정견(正見)을 갖는다는 말이고, 부처님 체성을 간직했다는 말이 됩니다. 참선의 보배는 정혜요, 참선의 원수는 혼침입니다. 참선을 하다 보면, 끝에 가서 확 터져서 우주와 하나가 됩니다.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아미타불이 어디 계시는가?
마음에 새기고 새겨 간절히 잊지 않고 생각하면 생각이 다하고 다한 끝 이르러 여섯문마다 자마금색 부처님 광명이 항상 비추리! 청량여래불, 한도 끝도 없이 우리 심신을 청량하게 하시는 부처님, 또는 청량지,열반과 같이 괴로움이 없는 청료한 자리,청량삼매, 일체의 밉고 곱고의 증애심이 없는 자리 등의 말은 참선의 개운한 맛을 나타낸 말입니다. 우리 잠재의식은 꿈속에서도 공부합니다. 그래서 오매일여,청량삼매,동정무간이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우리의 나태한 신심을 얼마나 격발시켜 주는 말입니까?
부처님은 생명의 본질로 계시니,안팎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은 상징적인 부처님이며, 천지 우주에 충만한 부처님은 안 계신 곳이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믿는 한 염불은 평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법이 자연한 수행법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수행은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 수행이라야 합니다. 부처님 이름은 공덕 따라서 부릅니다. 모두 하나의 부처님인데,부처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그 공덕에 맞는 부처님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예를 들면,중생 구제에는 관세음보살, 지혜에는 문수보살 등으로 공덕에 맞춘 이름,
명호를 쓰게 됩니다. 모든 참선의 선행 요건은, 먼저 천지 우주를 부처로 보는 견해를 세우고 닦아야 합니다. 우주 모두를 한꺼번에 다 비추어 아는 부처님 공덕을 아축여래라 합니다. 오지여래법문입니다. 오지여래는 부처님의 공덕을 다섯 가지 속성으로 구분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대일여래.불공여래.미타여래.아축여래.보생여래입니다.

부처님은 오직 한 부처님인데, 공덕이 많으니까 다 표현할 수가 없어, 우선 다섯 가지로 구분한 것입니다. 수식염불은 호흡을 헤아려 가며 하는 염불이고, 참구염불은 소리없이 마음으로 부르는 염불입니다. 간화염불은 부처님 명호를 화두로 해서 부처를 구하는 염불입니다. 관음염불은 천지 우주가 부처님의 자비로운 성령이며 관음화신이라 믿고 하는 염불입니다. 즉 일체 존재를 관음 화신으로 알고 하는 염불입니다.
하심하려면 법의 실상,우주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하심이란 자기를 낮추는 겸손입니다. 경전에 범하심자 만복자귀의, 즉 하심하고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는 만가지 복이 스스로 온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주객을 떠난 오직 부처님뿐입니다.

실상묘해라,천지 우주의 실상은 오직 부처님뿐임을 얻는 것, 우주에 참으로 계시는 것은 영원한 부처님 뿐이라는 것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실상묘해라,모두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깨쳐서, 이를 안 놓쳐야 진실설이 됩니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것은 실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부처와 내가, 법성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바른 참회로서 무생참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곳에 내 마음을 머무르게 하느 참회입니다.
자기라는 망집을 부정하는 것이 참회입니다.
차별심을 버리고 내가 부처임을 꼭 믿어야 합니다. 내가 부처임을 믿지 못하면 선오후수가 못되고, 따라서 참선이 못됩니다. 대수행인은 만법이 자신의 소현임을 관찰합니다. 비록 관찰도 참구도 않고 이름만 외운다 하더라도, 꼭 성불을 합니다.

원래 부처인지라, 또는 부처님 명호는 사람 이름과 달라서 부처님의 공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 자체가 부사의합니다.
부처님 이름은 부처님께서 친히 무량 공덕을 담아 만드신 진리의 이름입니다.
바른 견해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을 여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법이 나온 바도 멸한 바도 없음을 압니다.
생사에 걸리는 수행은 바른 견해의 수행이 못됩니다.
스스로 자증自證한 부처님의 지혜(聖智)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간혜는 비록 지혜는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선정의 지혜를 얻은바가 아니므로, 생사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생사를 면하는 길은 철저하게 본래 생사가 없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옹졸한 마음이 뭉치고 뭉쳐서 병소가 됩니다. 병소 속에도 부처님은 들어있습니다.

마음이 탁트이면 병이 없어집니다. 정말로 부처님을 믿으면 마음이 확 열리게 되고, 확 열리면 병이 떨어집니다. 부처님 지혜, 곧 성지는 이론과 더불어서 본체를 증명해야 합니다. 이 증명의 길이 참선이고 염불입니다. 증명이 안되면 닦아 얻은 바가 없는 것입니다. 간혜는 부처님의 진리를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며 간혜에 머물면 방편 공부밖에 아닙니다. 힘을 얻지 못하고 생사의 길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 지혜는 체증(體證)공부입니다. 삼매는 심신과 생리를 정화시킵니다. 간혜만 얻더라도 고통이 덜하고 바른 길을 갑니다. 간혜지를 얻어서 염불해야 합니다. 진진찰찰 구청구설 塵塵刹刹 俱聽俱設 이라, 법계의 모든 유정 무정은 모두 법을 설하고 법을 듣습니다.

바로 보면 일체 존재가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모든 소리가 염불이고 설법이 아님이 없습니다.
무아는 불교의 대요체이며 대강령입니다.
무상이기 때문에 무아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아(我) 아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부처입니다. 왜 무아가불교의 대강령일 것인가 불교는 아를 떠나고자 하는 수행이고 염불입니다.
그래서 아를 떠난 것이 부처입니다. 인생의 가상은 허망하나,실상은 항상 존재합니다. 참 나는 대아요 진아요 본래면목입니다.
참 나는 불성으로 이루어진,생멸을 떠난 영원한 존재입니다.

문(聞)사(思)수(修)로 불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무상이 무瓚막?안보이니 문제입니다. 무상의 자기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문 사 수입니다. 문(門)은 많이 듣고 간직함입니다. 사(思)는 행동으로 참다운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며, 수(修)는 닦는 행위입니다.
염불과 참선입니다. 가장 하기 쉽고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염불입니다.
참 염불은 천지 우주가 이대로 부처님뿐이라고 보고 아미타불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빼놓지 않아야 참선이 됩니다.
따라서 불심에 입각해야 참선이 된다는 점에서, 참선과 염불은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선시불심(禪是佛心) 교시불어(敎是佛語)이라 하지 않습니까?

선은 부처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 말씀이며, 부처님 행위입니다.
일체 만유가 부처님과 더불어 하나다.
즉 일체 만유가 부처님이라고 보는 것이 염불이고, 곧 염불선이 됩니다.
모든 것은 부처님뿐이다. 불성뿐이라고 믿고 생각하면서 염불하면, 단순한 칭명염불이 아니라 염불선이 됩니다.
마음이 불심에 안주해 있으면, 어느 곳이나 선방(禪房)이다 해서 무처선(無處禪)이고, 어느 때고 선을 할 수 있다 하여 무시선(無時禪)입니다.

염념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이라 했습니다. 생각마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진리를 생각하면, 모두 극락세계라 했습니다.
실은 티끌 하나도 부처 아님이 없고, 오막살이도 극락 아님이 없습니다.
염불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소리뿐의 염불이 아니라, 부처님을 생각하고 기리는 마음이 겸비되어야 합니다. 천안통(天眼通)으로 삼매에 들어 천지 우주와 하나가 되어야, 불성을 봅니다. 불성을 봐야, 사물을 바로 보게 됩니다.
사물을 바로 보는 불안청정(佛眼淸淨)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불성에 안주하기 위해서는, 자기 견해의 유한성을 알아야 합니다. 불성을 느끼고 염불하면, 심장이 연꽃처럼 활짝 핍니다.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면 병도 낫습니다.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자식으로 생각하십니다.
법화경 등 여러 경전에서,부처님은 중생을 “모두 내 아들(皆是吾子), 중생을 가엾게 여기시기를 갓난아이같이 여긴다(哀愍衆生 如赤子)"라고 하셨습니다.

천지 우주가 부처님뿐이라고 느끼고 염불하십시오.
실로 우리의 능력은 본래로 부처님이기에, 석벽무애(石壁無碍)라, 돌벽도 뚫고 나갑니다. 불성 광명이 마음 따라 움직입니다.
우선(右旋)하면 전자(電子)가 나오고, 좌선(左旋)하면 자력(磁力) 곧 인력(引力)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금진(金塵)이라는 원자핵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나옵니다.
대승(大乘) 공부는 이 몸 이대로를 광명으로 봅니다. 광명은 내 몸이나 내 마음의 근본입니다. 동시에 광명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이요 공덕장이라, 일체 작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 우주나 내 몸이 광명 덩어리입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위대한 광명인 부처님 진리를 증거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광명은 온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 자체입니다. 인생 행로의 지표가 인연법입니다. 인연법이 따라 인생이 진행, 발전,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은혜의 알맹이는 인연법입니다. 이것은 인(因)도 연(緣)도 과(果)도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원칙, 화학적 법칙이 모두 인연법입니다.
모이고 흩어지고 생성하고 파괴되는 모두가 인연법을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연법은 뛰어난 과학입니다.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인지라, 사람을 봐도 부처요, 개를 봐도 부처입니다.
부처로 생각해도 손해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생각, 가장 좋은 행동, 가장 좋은 말이 부처입니다.
그 중에 염불은 바로 이런 소중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수행이므로 수행 중의 수행이 됩니다. 진리 자체,생명 자체,광명 자체,우주 자체를 사모 찬탄하는 수행입니다.
염불선은 어느 때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하기 쉬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부처님 경전 이백부 이상에서 염불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사랑 가운데 사랑이요, 님 가운데 님입니다.
어이하여 사랑 가운데 사랑인가? 가장 사랑하는 내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왜 님 가운데 님인가? 내가 목마르게 그리워하며 찾아가야 할 내 생명의 고행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일체 만유의 님이요,
평생 우리가 닦다가 종국에는 돌아가야 할 필경의 의지처입니다.
부처님을 자기 님으로 사랑하는 선법, 이것은 벌써 자기 감정에 만족한지라, 찾으면 찾을수록 더 그립습니다. 성불하면 점수(漸修)가 필요 없지마는, 그렇지 못하면 점수가 필요합니다. 계행 청정으로 생리가 정화되어야, 법성을 맛보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그래서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선정해탈을 얻고 멸진정(滅盡定)을 증(證)해야 성불입니다.
멸진정은 모든 번뇌와 망상을 없앤다 해서 멸진입니다. 중생은 망상을 내 마음으로 하고, 자성이 바로 참된 법신인 줄을 모릅니다.

자기의 참 법신은 우주에 변만한 부처님인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과 더불어서 터럭끝 만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무량수경에 이 마음이 바로 부처요(是心是佛), 이 마음으로 부처를 만든다(是心作佛)고 했습니다. 문득 본성을 깨닫는 것은 쉬우나, 무수생의 습기習氣는 하루아침에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이것이 점수(漸修)입니다. 우리 생리가 정화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생리와 심리를 정화시키는 것이 계행입니다. 계율이 앞서야 삼매에 들 수 있습니다.
삼매로 마음이 정화되어 업이 녹아지면, 자연의 천고 소리를 듣습니다.
천고는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우주의 음입니다.
나무의 혼도 순수 생명으로 목신(木神)이고, 산의 신은 산신(山神)입니다.
모든 자연이 생명입니다. 혼은 순수 생명을 말합니다.
불성과 하나가 될 때 삼명육통을 합니다. 꼭 삼명육통을 못해도, 오래도록 부처님을 안 떠나고 공부하면, 광촉光觸(부처님 광명과 접촉)이 되어 업장이 소멸됩니다.

"제가 과거세에 무슨 죄로 이리도 추녀로 태어났습니까? 하고 기도하자 부처님께서 광명으로 감싸서 어루만져 주시자 추녀가 미녀로 되었다는 醜女改容의 고사가 있습니다. 부처님 광명은 소경도 나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 광명을 접할 수 있는 길은 삼매입니다. 부처님 파장과 내 생명의 파장이 맞을 때, 부처님 광명을 접할 수 있습니다. 광명을 느끼면 순식간에 나을 수 있습니다.
공부가 짙어지고 정화될수록 부처님 광명이 커집니다. 그래서 부처님 광명이 우리 몸에 접촉되고, 우리를 감싸기도 합니다.
심월고원 광탄만상(心月孤圓 光呑萬相)이 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마음 달이 홀로 둥근데, 일체 만상이 모두 광명에 든단 말입니다.
만상이 광명에서 나와 광명으로 갑니다. 영원한 광명인 적광색(寂光色),적광명(寂光明)은 우리 눈에는 안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존재와 나는 하나입니다.
연축자재(延縮自在)하며,내 하나의 생각이 온 우주에 미칩니다. 내게 있는 불심 자리를 관조하는 것이 묵조선입니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야 동체대비(同本大悲)이며, 상이 없어야 참 자비입니다. 일체 만유를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진여불성으로 보는 견해가 정견입니다.
불안을 해소하고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따라서 너와 나를 둘로 보는 이원론으로는, 불교도 아니고 안심도 얻지 못합니다.
현상과 근본이 합해진 것이 불교입니다.
바닷물이 바람에 의해 일어나 파도가 되지만, 바람이 자면 파도는 없고 바다만 있습니다. 순수 생명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불교인은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를 성불하게하는 부처님의 원(願)을 믿어야 됩니다.
우주에는 우리를 불성으로 이끄는 인력이 있음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를 부처로 만들려는 원의 힘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음도 믿어야 됩니다.
삼계가 부처뿐인데 누구를 나무라겠습니까?
관무량수경에 부처님은 입일체중생심상중(入一切衆生心想中)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어디 계시는가?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곧 내 안에 내 마음 속에 계십니다. 또 나는 부처님 안에 있습니다.
부처님과 나는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몸은 우리의 업장에 붙어 있는 짐입니다. 자기 업장에 알맞은 몸을 받습니다. 몸은 업장의 소산입니다.
자기 몸을 보며 업장을 짐작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무슨 경이나 그 경이 최고의 경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이 성불의 법입니다. 그래서 정통 조사는“이 한 가지만 법이다”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염불은 부처와 중생을 하나로 인식하고, 이것을 안 떠나려는 것입니다. 염불을 놓치지 마시고, 염불을 통해 부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성과 접근이 됩니다.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 덩어리입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부처님 몸이 법계 곧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진진찰찰(塵塵刹刹)이라, 티끌 하나도 부처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두두물물화화초초(頭頭物物花花草草)가 비로자나진법신(毘盧遮那眞法身)이라는 화엄경 말씀도 있듯이, 우주 삼라만상이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원력은 부처님 무량 공덕을 믿는 신앙심에서 생깁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란 말씀이 법성게에 있습니다. 이것은“내가 원을 세울 때가 바른 깨달음에 드는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원이 세워지지 않는 신앙이나 수행은 무력합니다. 원은 바로 힘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큰 기반입니다. 신앙은 도의 뿌리요, 공덕(능력,수행력)의 어머니입니다. 신해信解 공덕인 믿음과 깨달음의 공덕은 오바라밀(五波羅蜜)(육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을 뺀 공덕, 즉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의 다섯가지 공덕)을 능가합니다
믿음의 공덕이 이렇게 큽니다. 믿는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믿어야 합니다. 순수한 믿음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염력念力은 광선보다 빠릅니다.
염력은 곧 우리 마음의 힘입니다. 제일의제를 이어감이 선정이고, 제일의제를 안 놓침이 정견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정에 잠겨야 합니다.
그래야 습기가 녹고 업장이 소멸됩니다.

성불에까지 못 갔어도,부처님 명호를 외우거나 참선을 하면, 부처님과의 사이에 통로가 열립니다. 계행이 청정하지 못하면,선정을 얻지 못합니다. 계는 법기(法器)입니다. 법을 담는 그릇이고, 계정혜(戒定慧) 삼학 중에서 계를 첫째로 꼽고 있습니다.

부처님 열반시에도,아난존자가 “이제 누구를 스승으로 삼습니까”하자, 계를 스승으로삼으라 하셨습니다. 또 계가 청정하지 못하면 삼매를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조四祖 도신스님도 염불선을 하시고 신라 무상스님도 염불선을 하셨습니다. 원통 종교인 불교는 염불선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범부의 막히고 묶인 마음은 염불선으로 풀어야 합니다. 자기가 부처임을, 자기 본성이 불성임을 확인하기 위해 염불을 합니다.

우리 본각의 참 성품을 깨닫는 것이 곧 참다운 염불입니다. 생각 생각에 부처를 안 떠나면서,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마음을 가질 때 참 염불입니다. 참선의 길은 복 받는 길입니다. 공부 잘하면 복도 최선으로 받습니다. 왜냐하면,불성에 접근할수록 무량한 복이 밀려옵니다. “천지 우주가 부처님 뿐이다”고 믿으면, 부처와 나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집니다. 벌써 가피가 옵니다. 참 부처님은 생명의 부처님입니다.
곧 법신 부처님(法身佛)입니다. 자비도 원만,지혜도 원만,공덕도 원만한 것이 부처님입니다. 그런 참 부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상징적으로 등상불(等像佛)을 모십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부처님은 온 누리에 가득 차 있습니다.
부처님이 무엇인가를 모르면,바로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부처님의 성령 기운이 들어가소서”하여 봉불식(奉佛式)을 합니다.
물질 뿐만 아니라,내 생각,관념도 인연 따라 이루어집니다.
전생인과 부모연과 금생연따라 내 생각이 이루어집니다. 인연생멸하는 것이 내 마음입니다. 그래서 법신게(法身偈)에 제법종연생(諸法從緣生) 역종연멸(亦從緣滅) 아사대성주(我師大聖主) 위아여시설(爲我如是設) (천지만유가 인연 따라 생기고,또한 인연 따라 소멸하나니, 우리 대성자 부처님은 우리를 위해 이와같이 설하신다)” 이라고 했습니다. 인연법은 우주의 도리입니다.

주고 받는 것도 인연이며, 내가 하는 것도 인연으로 되어집니다.
불교는 인연법이라 간단합니다. 아는 것도 인연 따라서 압니다.
그래서 가장 옳은 생각은 부처님 생각이고, 참다운 스승은 성인뿐입니다.
"정직한 분 가운데 가장 정직한 분은 부처님이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정화 정도에 따라 마음이 깊어집니다. 우리 마음이 머무를 곳은 중도실상, 즉 지혜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염불이고 참선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몸이 텅 비어 버립니다.
부처님 말씀이 고마워 며칠이고 웁니다. 공부해 보면 아십니다.
부처님께서 만유가 비었다고 하신 것은 다 빈것입니다.
부처님은 진실만 말씀하십니다. 천태지의선사는 “우리 마음을 空假中(공가중)에 머물게 하라”고 했습니다. 곧 실상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참선이 됩니다. 실상 자리는 부처님으로 진리로도 표현됩니다. 두두물물이 부처요 천지 우주와 내가 이대로 부처라는 마음이 보리심입니다. 이 보리심으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 참선이 됩니다. 참 염불이 됩니다.또한 염불선이 됩니다. 공부가 깊어질수록 믿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그리고 수행이 깊어 질수록 밝은 빛이 비쳐옵니다.
부처님 광명이 처음에는 별빛만 하다가 점점 넓어집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몸도 가볍고 시원해집니다. 꼬집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무량수경 유통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그지없이 기뻐하여 아미타불을 다만 한번만이라도 생각 한다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 두어라. 바로 이것이 위없는 공덕을 갖추게 되는 것이니라”
부처님이 미륵보살에게 부촉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설사 맹렬한 큰불이 삼천대천 세계에 충만하다 하더라도, 한사코 뚫고 나가서 이 경전의 가르침을 들어야 하느니라, 환희심으로 믿고 지니며 외우고 기억하며, 가르침과 같이 수행해야 하느니라” 염불선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면서 실상 즉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진여불성 등)인 것을 관하는 수행입니다.

한 가지 더 간곡한 부처님 부촉을 전하겠습니다. “내가 중생들을 위하여 무량수경을 설하고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관한 모든 공덕 장엄을 보고 듣고 알도록 하였으니,
마땅히 정진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함을 간구할 것이며, 의심을 품어서는 안되느니라” 정토삼부경에 “ 먼 미래에 이 세상에 불법이 망하고 모든 경전이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자비한 마음으로 말세 중생을 가엾이 여겨, 특히 이 무량수경만은 일백년을 더 오래 머물게 할 것이니라, 그래서 누구든지 이 무량수경을 만나서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이는, 그들의 소원대로 모두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설만세계화(設滿世界火) 필과요문법(必過要聞法) 요당성불도(要當成佛道) 광제생사류廣濟生死流”라 하였습니다. “설사 세계가 불로 가득하더라도, 반드시 꼭 들어가야 할 법문이니, 마당히 성불하여 생사의 바다에 있는 중생을 널리 구하라”는 뜻입니다 성자는 인간 해방을 몸소 체험하신 분입니다. 가을은 생물의 귀천성(歸川性) 동물의 귀소성(歸巢性) 식물의 歸根性처럼,인간의 마음도 생명의 고향으로 가고픈 본능 때문에 외로워집니다. 이 마음이 부처님을 그리워 하며 부르게 되어 있어 가을은 참선의 계절입니다. 염불하는 사람들은 갈망심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이 외로움을 통해 순수 신앙의 문이 열립니다.
푸른 하늘은 청공으로 열린 고향 같고 부처님을 지향하고 진리를 우러르는 마음은 그지없이 순수해집니다. 수행은 자기 성향에 따라서 해야 진전이 빠릅니다. 맞지 않으면 시간 낭비입니다.

부처가 되게 하기 위한 우주의 원력과 법칙과 서원이 (本願)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을 성불시키겠다는 뜻이 본원입니다.
우주가 본래 갖춘 서원이 본원입니다. 극락세계가 광명 정토이고, 아미타불은 우리의 실상이자 본래면목이고 극락세계 교주이시며 우리 자신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극락세계는 우리와 별개의 세계가 아닙니다. 또한 극락 왕생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극락세계는 실존하는 세계입니다. 광명 세계가 천상에 있다 하더라도, 이 세계가 광명세계가 되어갑니다. 생각을 거듭하면 정확 되어갑니다.
극락세계는 바로 보면 천지우주가 다 극락세계입니다. 왜냐하면, 천지 우주가 부처님 광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사스님은 이 우주를 일과명주(一顆明株)라 했습니다. 한 덩이 밝은 구슬이란 말입니다. 불성 광명에서 보면, 모두가 맞닿아 있는 찬란한 구슬입니다.
부처님 법에 여법(如法)하게 따르는 생활은, 여법주의(如法主義) 불성주의(佛性主義) 인도주의(人道主義)입니다. 부처님과 진리와 윤리에 따르는 생활입니다.

항상 부처님을 앞세우고, 마음 가운데서 부처님이 떠나지 않는 생활입니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삼계가 별도로 있지 않고, 오직 마음뿐입니다. 우리는 욕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욕계에도 높은 천상이 많습니다.
부처님은 어디에만 주재하지 않고 천지 우주에 가득 차 움직이는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도 부처님을 떠나 있지 못합니다.
이승(二乘)은 인생을 고(苦)로 봅니다. 보살은 인생을 공(空)으로 봅니다.
부처님은 인생을 마음(心)으로 봅니다. 일체유심조로 봅니다.
마음이 열린 정도에 따라, 각각 보는 세계가 다릅니다. 그러나 오직 천지 우주가 부처님뿐이라는 생각을 안 떠나면, 그 마음을( 一念法界)라 합니다.
천상(극락)세계는 항상 일념법계입니다. 항상 염불(念佛) 염법(念法) 염승(念僧)의 염불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처님을 성품으로 보면 불성, 인격으로 보면 부처님, 지혜로 보면 유식(唯識), 마음으로 보면 유심입니다. 우리는 유식과 유심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원자핵이나 전자도 부동한 실체가 아닙니다. 움직이는 운동상(運動相)입니다. 상을 떠나면 에너지뿐입니다. 그리고 에너지의 실체를 불성,부처님이라 합니다. 곧 상을 떠나면 마음뿐입니다.불심뿐입니다. 초목무심호소승(草木無心號小乘)이라, 나무나 풀은 마음, 즉 식識이 없다고 보는 것을 소승이라 합니다.
만유를 본체(부처님)에서 보고,본래에 입각해야 대승입니다. 만유를 상에서 보는 것이 또한 소승입니다. 산소,수소,질소, 두두물물이 모두 부처로 되어있습니다. 불성뿐입니다. 불성뿐인 실상을 잘못보는 것이 번뇌요, 무명입니다.
낙엽을 밟으면서 이 가을에는 인생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무상의 계절에도 무상을 무상으로 안보고 못느껴서 문제입니다. 무상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염불과 참선을 하되, 꼭 계를 지니셔야 합니다. 용수보살 법문에 “계를 지키는 자는 안되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실상에서 보면 모두가 극락입니다.
이제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가, 첫째 쉽게 닦는 이행문을 택하여 염불을 하며,
둘째 정견으로써 천지 우주 만유와 내가 한 생명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셋째 도덕적인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가장 높은 그리움은, 모든 존재의 근원 생명인 부처님을 향한 그리움입니다. 이 마음과 불성과는 거리가 없습니다. 닿아 있습니다. 미운 사람도 예쁜 사람도 없는 그 자리에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마음자리입니다. 참선은 구(求)함이 없어야 하지만,그것은 구경의 목적지요, 처음에는 구하는 푯대(標主)가 있어야 합니다. 구할 때는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
래야 구함이 멈추어지는 경계에 도달합니다. 즉 유심에서 구함이 사무쳐서 무심이 됩니다. 이렇게 정화되면, 극에 이르러 불성과 접하게 됩니다. 염불선의 경우 애써 구해서 사무치면 구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미숙할 때는 처음에 생각을 내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내야 합니다. 구하는 생각이 들뜨면 안됩니다. 가라앉히고 나서(구하는)생각을 냅니다. 우리가 보려는 금색 광명도, 청정무비한 적광을 보아야지, 태양 광선을 생각하면 상기(上氣)됩니다. 몸이 안 좋을 때는 내 몸이 공한 것으로 믿고 공관(空觀)을 함이 좋습니다. 참선중에 광명이 밝아옴을 보면 명득정(明得定)에 이른 것이며, 밝음이 더 느껴지면 명증정(明增定)에 이른 것이며, 다음에 마음과 몸이 비어오면 여기서 공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인순정(印順定)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공부 차서(次序)인데, 맨 처음 명득정은 유식론에서 붙인 이름이며 사선근에서는 난법상(煖法相)이라 하고, 명증정은 (頂法相)이라 하여, 광명이 증가되어 갑니다. 다음 인순정을 인법(印法)이라 하고, 욕계의 가상(假想)이 허공 같음을 믿고 확실히 인증 한다는 경계입니다.   
 [법문을 설하신 때가 가을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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